목수연장의 소개

[nokogiri]

노코기리

2톱의 발달사

톱의 출현은 낡고, 구석기 시대에 원시적인 것은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다.하지만 목공구로서 실제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금속제의 톱이 등장하고 나서일 것이다.기원 전 이집트, 중국의 은 주(周)시대는 이미 청동제의 톱이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4세기경에는 현재의 것과 거의 변함이 없는 것이 나와 있었다고 한다. 철제톱은 유럽에서 로마 시대, 중국에서는 진·한나라 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다.이것에는 청동제 톱에는 볼 수 없었던 톱니의 경사나 바지가 부여되어 있어 가공 능력은 크게 향상하고 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시에는 돌도끼가 가공의 주요 도구였다.야요이 시대가 되면 철의 기술이 초래되어 철 도끼가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철제 톱의 출현은 꽤 늦어 고분 시대 전기라고 생각되고 있다.다만 고분 시대 전기의 톱은 단책형 철판에 소치를 새긴 간소한 것으로, 건축 생산에 실용되고 있었는가 하면 의문표가 붙는다.고분 시대도 후기가 되면, 나무무늬를 장착하기 위한 줄기(나카고)를 가지는 것이 많아져, 톱니에 가가리목이나 바지·나게시를 가지는 것 등, 목공구로서의 진보를 볼 수 있다.

고분 출토의 톱(5세기, 복원품, 오카야마현 긴조야마 고분 출토)

고분 시대에는 고분에 부장되어 있던 톱도, 고분 축조가 감소함에 따라 출토수도 줄어들고, 아스카·나라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현존하는 톱도 특이한 형상을 한 것이 많아, 불명한 점도 많지만, 전시대에 비해 대형화해 목공구로서 거의 완성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그 중에서도 호류지 헌납 보물 톱은 전세품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톱이며, 톱신을 일부 파손하고 있지만, 나무무늬를 완전히 남기고 있는 귀중한 것이다.

또 현존하는 목조 건축으로 톱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최고례도 호류지의 건물이다.수리시의 조사에 의하면, 대토의 절단면에 톱 자국이 확인되고 있다.

8세기경의 출토 톱(실측도, 군마현 시라쿠라 시모하라, 텐인 무코하라 유적)

중세에 들어가면 톱니를 곡시켜 첨단부가 날카롭게 한 '나뭇잎형 톱'가 이용된 것이 그림책 등에서 알 수 있다.이 형식의 톱은 에도시대 중반까지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출토 예는 적다.

제재에 시점을 향하면, 무로마치 시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 세로 톱은 없고, 끌에 의한 치는 법으로 제재가 행해지고 있었지만, 중세에 들어가 2명 벼룩의 세로 톱 「오가(오가)」가 대륙으로부터 초래되면 제재 능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건축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 큰 톱은 우리나라에서는 단기간에 자취를 감추지만, 그것은 1인 벼룩의 「마에다리」와 소할용의 「가가리」로 형태를 바꾸어 전해져 메이지 중반에 기계 제재로 대체될 때까지 제재의 주류였다.특히 폭넓은 톱밥을 가진 마에키다이는 일본 독특한 톱이다.

2명 까마귀의 제재용 종갈 “대톱”(복원품)

1인 까키노 제재용 종갈 “마에비키”(메이지 무렵·오미 고가산)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도구 생산력의 향상과 직능의 분화에 의해, 톱은 용도별로 세분화가 진행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전통적인 톱의 많은 형식이 나왔다고 생각되고 있다.또 아이즈나 미키 등의 톱의 산지가 발생한 것도 요즘이다.메이지가 되면 오늘 보는 듯한 양날 톱이 발생해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

한편 메이지에서 시작된 제재의 기계화는 서서히 손도구를 대체하고, 전후가 되면 비약적으로 발달한 전동공구에 의해 목수일도 기계화되어 오늘날 손도구로서의 톱은 그 발달의 걸음을 끝내버린 것처럼 보인다그렇지만 손도구가 가져오는 촉감이나 정확도를 요구해 좋은 톱을 찾는 목수가 무르익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1996년 기획전 “톱의 소우주” 도록 해설에 대폭 가필)

  • *본 페이지의 내용은 『다케나카 목수도구관 수장품 목록 제1호-톱편-』의 해설을 발췌한 것입니다.
  • *품명은 주로 간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 명칭을 참고하여 본 박물관에서 사용되고 있는 통일 명칭에 따라 있습니다.지역이나 연구자에 의해 도구의 명칭은 될 수 있습니다.